일상

직업

dowori57 2017. 12. 8. 18:53
728x90
반응형

살면서 여러가지 직업을 가져봤다.

좋다면 좋은것이고 한우물을 파는 사람에게는 거리감이 많은 경험이다.

그러나 좋아서 한것이 아니라 인생의 발자취이자 살아온 길이다.

대기업에 입사하고는 십년에서 일년이 모자라는 세월을 근무하고는 사표를 내고 퇴직하였다.

동기들에 비해 진급에 한발 앞서 나아갔고 나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고,크게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삼십세후반의 과장무렵에 상사와의 갈등도 있었고,

어느순간 과연 사십대후반의 모습을 그려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열심히 근무하면 부장은  달아 주겠지만 임원달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하였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여러가지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니 별을 단다는 것은 힘든것이라는 결론을 내고는

여러가지를 검토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어느날 점심을 먹고는 여유시간에 남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사주를 보는 사람에게 재미삼아

보았더니 '젊은 사람이 무엇을 망설이냐. 실행을 하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중년의 사람의 고민이 퇴직에 대한것을 빼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게 짐작하고 이야기를 한 것인데, 생각하던것도 있었고 해서 퇴직을 결심하고 집안에 이야기를 하였다.



집사람부터 부모형제가 말린다.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 사업이 쉬우냐등으로 설득을 하였지만, 한번 마음먹은 것을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퇴직을 하고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하나 얻어 핸드폰 판매업을 시작하였다.

자금도 부족한 입장이고  당시만 하더라도 모토로라의 핸드폰이 이백오십만원가량하던 시절이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사용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제품을 받으려면 선입금을 하고 개통시에도 시험검사소를 방문하여 몇시간을 투자하고는 검사에

합격하여야 개통이 되었다.

자금과 영업관계로 동서의 지원도 받았고 나름 열심히 움직였으나  시작할 무렵의 마진이 한해가 지나갈

무렵이 되니 연초대비하여 1/8수준으로  마진이 줄어들었다.

대중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신사에서도 매장과 서비스인원을 갖춘 대리점을 모집하면서 대형화를 유도하였고 그러자면 상당한 자금이 소요되어 진입이 난감하였다.


대학동기 하나가 용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동업을 제의해와 거절하였는데, 인천에 살면서 매일저녁 전화를 해서는 설득하기를 일주일. 마침 하던일도 시원찮고 동창의 정성이 대단하여 부친의 일부지원을 받아

동업을 시작하였다.

보다나은 미래를 생각하여 힘든현실을 열심히 살았는데 밝은 미래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용산에서 신림동으로 이전을 하였는데 매출에 욕심을 내면 부실채권이 발생하였고, 안정되게 유지하면

소득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월급소득자보다 나으리라는 믿음이 서서히 무너져 갈 무렵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는 동기에게 양도하고

발을 떼었다.

동기는 어음을 난발하다보니 한참후에 부도가 나고 많은 손실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는 당시로는 첨단인 GPS를 이용한 지도를 개발하는 중소기업을 다녔는데, 모 대기업의 A/S카의

위치와 이동현황을 지도상에 나타나게 개발하는 기술을 가진회사였는데 당시로서는 첨단을 가고있었는데 

거래처 확보가 싶지않았다.  근무하는 중 사업을 하는 다른 대학동기가 몇번을 찾아와서는 같이 동참을 하자고 제의를 해와 고민을 하다가 전직을 하였는데,막상가서 근무를 하여보니

만기도래되는 어음을 막으려고 동서로 분주하게 움직여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는 IMF가 와 당시 3개의 메이저급의 DATA통신업체중  나머지 두개 업체는 승승장구를 하였는데

이 업체는 경영이 어려워 다른 기업체가 인수하고도 제품개발과 시장개척이 늦어 어려움에 처하니

인원을 줄일수 밖에 없었고  권고사직이 되었다. 부실채권의 책임을 지고 퇴직금 한푼받지 못하고 나왔다.


당시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대단하여 처갓집에 모이면 고스톱을 밤새워 치곤하였는데, 실력도 부족하지만 

주머니에 달랑 이삼만원을 밑천으로 치니 금방 거덜이나면 집을 나와 카드로 몇만원을 인출하곤 하였다.

어느날 동서의 집을 갔는데 거실의 미니오디오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그것을 살 돈이 없어 구입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불과 이십만원도 채되지 않는 제품이었는데...


그리고는 보험영업을 시작하였다. 연고영업을 위주로 하다보니 이년차가 조금 지나니 소득이 줄어들어

고민을 하고 있던차에 지인의 소개로 중소기업에 자리를 확정하였으니 면접만 보면 된다고 하여 면접을

보았는데, 회사의 대표는 황당하게도 지인의 소개로 와서는 곤단하다고 퇴짜를 놓았다.

아마도 내부를 상황등이 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 것 같았는데,그렇다면 지인인 친구에게 소개를

부탁하지 말았어야지...참으로 곤란한 경우를 당하고는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그런던중 전혀 알지도 못하는 벤쳐기업에서 같이 근무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일산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자동우편발송기의 영업을 담당하였는데 역시 판매가 쉽지를 않아 어려움에 처해

동창의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일년정도를 근무하였는데 한두달은 급여를 받았는데 그후로는 어렵다며 급여도 받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니 받지 못하는 몇백의 급여보다는 받을 수있는 금액이 낫겠다 싶어 택시운전면허를 취득하고

택시운전에 도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때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신문도 배달하였다.

새벽3~4시경 일어나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서 아침까지 돌리고는 식사후 출근을 하였다.



그러던차 동서가 안산공단에 아는 업체에 취업을 알선해 주는데 우선은 자리가 없으니  사장의 기사를

조금하면 자리가 나는데로 옮겨주겠다고 해서, 택시를 하려고 하였는데 그것 못하랴싶어 자리를 옮겼다.

목동 집에서 새벽4시경 일어나 구형 곽그랜져를 타고 송파로 이동하여 사장을 태우고는 안산공단으로

출근하여 아침을 먹고  쉬다가 이동하고 저녁을 먹고는 밤10~11시에 퇴근하여 사장을 태우고 송파로 이동하고 다시 목동으로 돌아오니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바로 자릴만들어 준다는 말은 소개한 동서의 이야기이고 사장은 그럴 의향이 없어 보였다.

국졸의 사장은 새벽에 출근하여 야밤에 퇴근하면서 그야말로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중  예전에 소개를 하였던 지인이 다시 연락이 와서 전에 면접을 보았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으니 다시 가면 취업이 될 것이라고 하길래 그 업체는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고

퇴짜를 놓았다. 그러나 소개한 사람은 미안한 마음에 계속전화를 하고는 만나자고 하여 퇴근후

늦은밤 만났더니 친구에게 '소개해 달라고 해서 소개해 주었더니 개망신을 주고는 이제와서 또 무슨

얼굴로 부탁을 하느냐'고 욕을 했더니 미안하다고 백배사죄를 하면서 이번엔 절대 그렇지 않을것이라고

다짐을 했다고  한번 만나보기만 하란다.

하는일이 힘들어 다시만났더니 바로 출근을 하란다.



취업한 회사는 중소기업이었으나 견실하고 내수와 수출이 균형을 이루면서 자체개발한 제품으로 안정된

재무구조를 가지면서 시장을 확장해 나가는 중이었다.

괴팍한 성격의 대표와의 갈등,인격적인 모독도 많았지만 수용하고 꾸준히 노력하며 참았다.

그동안 나때문에 힘들었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많은 수익을 엉뚱한 곳에 투자하여 법적인 문제가 얼키고 설키면서 애로사항이 많았다.

일원한푼도 승인없이는 지출않던 대표가 수백억을 맡겼더니 부실채권을 만들었다고 본인의 실수를

전가받아야하는 수모도 겪어 나가면서 참고 묵묵히 업무를 수행하였더니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니 대표도

어느정도 인정을 하여주었다.

그러다가 정년이 되어 퇴직하였으나,후임자가 마음에 들지않아 사직을 하니 2주일만에 복귀하여 추가로

2년을 근무하고 2세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데 부담이 되어 퇴직하였다.

초기 대기업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한 후로는 장년에 십여년이상을 안정된 생활기반을 가지게 해준 회사였다.


정년후 일년여를 놀아보았으나 집사람이 근무하고있고 혼자서 놀기도 미안하여, 인천공항으로 출근하여

항공기 토잉을 업무를 하였다.

교대근무를 하자니 늦은밤이나 이른새벽에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것도 위험하고

밤잠을 자지못하면서 근무하는 환경도 좋지를 않아 그만두고 잠간 소규모업체에 나갔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현재의 업체로 자리를 옮겼다.

정년퇴직후 할 수있는 일자리는 허드렛일이다. 건물관리를 하면서 설비와 장비의 점검과 유지보수등

그야말로 잡일이다.

최종기업에서 임원으로 재직하던것을 생각하면 못할일이지만  눈높이를 낮춰야지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먹고 출근할 수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도 복받은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직장과 직업을 가지면서 밑바닥도 기어보고 많은곳에서 일을 하여보았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인생2막이었다.

부모의 슬하에서 배우면서 자란 것이 인생의 1막이라면,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면서 생업에 열심히 종사해야

하는 인생2막. 그리고는 노년의 인생3막이다.

이젠 지금 이 순간이 좋다. 그리고 내삶이 뿌듯한것은 잘 살았던 못살았던 내 삶이요, 내 인생의 족적이다.

그러한 삶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환갑의 나이에 인생을 돌아보니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힘들고도 어려운때가 많았지만 참고 슬기롭게 이겨나갔으니 오늘날의 삶도 있는 것이다.

딸애는 결혼한지가 오년이 지나 귀염둥이 외손녀와 더불어 학교데 다니면서 열심히 잘 살아가니 다행이고,

둘째인 아들은 대기업에 열심히 다니면서 결혼을 한달여 앞두고 있다.

이제 예물도 들어오고 집도 장만하였으며,함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오늘 아침에 함을 차에 실어주고 출근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가정을 지켜주고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집사람이 건강하게 근무하고 있으며,

주말이면 산행과 트레킹,여행으로 같이 취미생활을 영위하는 인생3막의 삶이니

무엇하나 부러운 것이 없다.

누군가가 젊은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아니 지금,현재의 삶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

젊어보았으니 나이들어감도 나쁘지는 않다고,


728x90
반응형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해를 보내며..  (0) 2017.12.22
멍한 정신  (0) 2017.12.12
혼서지와 함포장  (0) 2017.12.04
예물  (0) 2017.11.20
나이  (0) 2017.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