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3일 국궁장을 다녀와서 딸,외손녀와 함께 저녁을 느긋하게 먹고있는데 장형께서 전화를 하셨다.
부친의 건강이 위독해져 오늘 저녁을 넘기시기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이 급작스레 나왔다는 것이다.
청천벼락같은 이야기이니 황망하기가 그지없다.
비록 연세가 드시어 언젠가는 돌아가시겠구나라는 생각이 없진않았지만 지난 구정에도 뵈었고 어제저녁만해도
딸네식구가 병문안을 드리고 이야기까지 나누는등 의식이 또렷하셨다고 했는데....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는 출발을 하려는데 운명하셨다고 연락이 온다........
바닥에 엎드려 애통함에 눈물을 흘리고는 차를 몰고 대구로 향한다.
성실한 교육가로 평생을 지내시며 5남2녀의 자식들을 돌보시느라 평생을 보내신 부친이시다.
국민학교 입학때는 당신께서 교장으로 계신학교에도 큰집에 놀러갔다가 입학식에 늦었다고 입학을 불허하셨고,
국민학교 4학년때인가는 담임선생님이 나오시지 못하여 교장이 수업을 대신들어오는데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다 걸려서 대표로 종아리를 눈물이 쏟아지도록 맞고는 집에서 대면하기가 싫어 부엌에서 점심을 먹은 일도 있었다.
매사에 엄격하시어 전형적인 교직자이셨고 시간개념에도 투철하시었다.
군에 복무시에 말년휴가를 나와서는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약속을 하고는 용돈을 달라고 하였더니
'이놈아 이나이 먹도록 하고싶은것 제대로 못해보았다.휴가나왔으면 집에서 식구들과 보내지 놀러를 가느냐'고
꾸짖는데 아차싶었지만 계획을 취소할수도 없고 그냥 갔다가 왔는데, 아직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민망하고
죄송하기가 그지없다.
그렇다고 퇴직하신 부모님을 열성으로 찾아뵙지도 못했거니와 어느하나 제대로 모신것이 없으니 더욱 죄송스럴뿐이다. 다만 위안 삼는것이 큰 걱정끼쳐드리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중년시절에 다니던 대기업을 만류하시는데도 사표를 내고 나와서 사업을 하겠다고 설치다가
도중에 자금부족으로 말씀드렸더니 두말않고 거금 삼천만원을 보내시었는데 그것마져 몇년만에 홀랑 말아먹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만들기에 쉽지않는 거금이었는데...
그후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한번 다녀오라는 친구의 조언으로 땅끝마을을 이박삼일인가를 다녀와서 마음이 푸근한 적이있었던 것도 이십년이 지난일이다.
모친의 건강이 좋으실때는 매년 생신날에 바깥에서 만나 일박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닌것도 수년에 걸쳐하였고
모친의 건강이 좋지않을때도 부친만 모시고는 형제들이 바깥나들이를 매년 하였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한다.
같이 모시는 장형이나 형수,누님내외가 많이 고생을 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일이다.
밤길을 달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시신만 모시고는 빈영안실이 없어 뵙지도 못하고는 그냥 철수하고는 익일부터
빈소가 차려지고 조문의 격식이 갖추어지며 입관식이 거행된다.
평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바뀌어진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리며 입관의식을 진행한다.
모습을 마지막으로 뵈올수있는 기회가 그리 길게 주어지지는 않고 의식이 종료되고 시신은 관으로 뒤덮인다.
그리고는 이틀간의 빈소가 모셔진다.
객지에서 살아온 세월이며 현직에서 물러나서 조문객이 그리많지는 않고 장형과 중형,매형의 조문객위주이다.
멀리서 찾아준 조문객을 맞이하고 친구들이 자리를 지켜주니 술을 마시며 거의 이틀을 보내고는 사흘째
발인이다.
간단한 발인의식을 마치고는 장형이 주도하는 성당으로 이동하여 카톨릭식 미사를 마치고는
미리 준비한 선영으로 두시간여를 이동한다.
장지에 도착하니 이미 중형이 인부를 동원하여 준비를 마친상태이니 바로 하관과 더불어 매장의식이 진행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봉분의 매장의식을 마치고나니 오후햇살이 가득하게 들어오는 곳에 봉분이 이쁜모습으로
자릴잡았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하며 어느날인가는 다시 만나 뵈올날이 있으리라.
이제 세상에서 반 고아가 되었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른 봄밤의 데이트(190309) (0) | 2019.03.13 |
---|---|
삼우제와 영덕,불영사(190228) (0) | 2019.03.01 |
부모 (0) | 2019.01.23 |
생일과 한해를 보내며 (0) | 2018.12.31 |
블로그 (0) | 2018.12.29 |